다시는 접속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 세계의 시작은 그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ㅡ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도 한참 동안 놓지 못하다가 접속을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접속하지 않으면 휴면 상태가 되고, 삭제되어 영영 복구할 수 없겠지 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인생의 1/3이 사라지는 건 역시 너무 서글픈 것 같아 계정 유지만 시켜두려고 다시 게임을 깔았다. 홈페이지에서는 프리시즌 이벤트 배너와 함께 강형욱이 반겨준다. OTP를 입력하라는 화면에 귀찮아하면서 스토어에 접속했는데 핸드폰에 이미 깔려 있다. 아직 안 지웠던 모양이다. 다행. 홈페이지 기준 마지막 접속이 작년 4월 1일이었다.


접속하자 부엉이가 미친듯이 날아다니며 퀘스트를 뿌려주는 광경은 이미 익숙하다.


새로운 타이틀 [정령의 동반자] 를 획득했다는 창을 보고, 의아해졌다. 새로운 정령 컨텐츠가 추가되었나?

전용무기창 구석에 박혀 있는 노랑빛으로 빛나는 플루트 숏 소드를 장착하고, / 를 눌러보았다.

?

정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정령석을 구해서 정령을 깃들게 해야 한다는 시스템 메세지만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자세히 보니 '클래식 정령무기' 라고 되어 있다. 검색을 해 보니 정령 시스템이 개편된 모양이다.

프렐류드.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따뜻한 정령이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기껏해야 랜덤하게 인사 키워드를 출력해내고, 정해진 키워드에 정해진 대답을 하는 데이터 조각에 불과했지만 내가 소중히 여기던 시간들이 사라진 기분이다. 길모어에게 통행증을 사서 처음부터 다시 퀘스트를 진행해야 하는 것 같은데, 지금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


키 세팅을 하려 환경설정에 들어갔더니 BGM을 변경하는 옵션이 있다. 프라하 버전과 오케스트라 버전이 있길래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해 두었다. 모든 BGM이 변경되는 것은 아니고 특정 마을에서만 출력되고, 오리지널 버전과는 차이가 있다.


펫 시스템이 개편되고 새로운 재능이 추가된 모양이다. 펫으로 퀘스트를 보내서 아이템과 경험치, 두카트를 얻는 것은 좋다. 그러나 펫에도 피로도 개념이 도입되어 휴식 장소를 만들어야 하는데 들어가는 재료(인조 잔디)가 핸디크래프트 1랭크만이 만들 수 있는 아이템이다. 린은 A랭크라 만들 수 없다. 경매장에는 납득할 수 없는 가격으로 마구 올라와 있다. 포기.


퀘스트를 열어보다 메인스트림을 하다가 중단했던 게 기억났다. 벨바스트에 비가 멈추지 않는 중 마나난 맥리르를 만나는 미션이었는데 몹이 너무 강해서 너프되면 해야지 하고 방치해 두었던 것 같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여러 마리의 몬스터가 다중인식하는 AI는 정말로 싫다. 반신화와 이신화와 포션 중독으로 다구리를 극복하고 한 퀘스트만 넘겨 두었다. 다음 퀘스트에는 중간 보스가 나올 것 같은데 자신이 없다. 사실 꾸준히 게임을 한다면 메인스트림 진도를 겨우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소환하지도 않은 펫 호루라기, 아직 Shop에서 수령하지도 않은 무제한 던전 통행증, 은행 구석에 넣어둔 엘리트 통행증, 각종 수련치 부스트 포션들, 다시 사용할 수 있을까. 모두 보스방에서 쓰러져서 한 사람이 여신상 찍고 달려와주기를 기다리던 날들. 상점에 좋은 색의 옷이 떴다고 없는 돈 꾸역꾸역 모아 산 천옷을 들고 기뻐했던 일. 선물받은 고양이가 너무 귀여워서 소환해 놓고 하루 종일 쳐다보기만 했던 날들. <향수>의 한 소절처럼,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그렇게 추억의 유통기한이 일 년 더 연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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