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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했다.
오후에 간 마트에서 즉흥적으로 저녁은 짜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문제였나.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던 카레용 돼지고기는 한두 시간 안에 냉장실에서 해동될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잘게 썰어 볶은 야채는 잘 익어 있어 고기를 투입해야 할 상태인데, 고깃덩어리는 마치 전체가 원래부터 하나로 된 덩어리였다는 것처럼 나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아서 배가 고팠다. 선택을 해야 했다.
고기가 천천히 익을 정도의 약한 불에서 열에 의해 녹는 것을 기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투하했다.
10초 정도 지났나,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백질이 열에 의해 하얗게 변형되었지만, 고기 조각은 전혀 분리되지 않았다. 몇 번 뒤집어 보다가 생각을 바꿨다. 힘으로라도 분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고기를 볶고 있던 주걱으로 쾅쾅 내리쳤다. 희게 익은 겉부분이 포슬포슬하게 약간 떨어져 나갔을 뿐, 여전히 냉동된 카레용 돼지고기 조각들은 견고하게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요리를 못 하는 사람들은 레시피를 무시하고 요리를 한다" 라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요리를 못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레시피를 무시한 것은 아닌데 왜 이 말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 상태로 포기해 버리면 대략 어른 주먹 하나 반 정도의 거대한 고기 덩어리의 바깥쪽은 익고 안쪽은 익지 않은 음식물 쓰레기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고기는 비싸니까, 이대로 보낼 수 없다.
쾅쾅! 쾅쾅!
옆집에 사시는 분, 혹시 퇴근하셨다면 휴식에 방해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원래의 고기조각끼리의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 겉부분의 익은 고기를 계속 내리쳐서 사과 깎듯이 깎아내는 수 밖에 없다. 떨어져 나간 고깃조각은 얇고 불규칙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엄청 맛 없어 보인다. 어차피 짜장을 풀면 안 보이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20분 정도의 사투 끝에 냉동 카레용 돼지고기 덩어리는 너덜너덜한 고깃조각 더미로 변형되었다.
다행이다. 고기를 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되어서.
냉동 고기는 절대로 냄비에 넣어서 녹이지 말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아, 짜장은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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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사각.
자려고 누웠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벽걸이 에어컨과 에어컨 호스 연결부에서 나는 소리다.
사각사각.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바퀴벌레다.
우리 집에는 그리마가 산다. 몇 년 전에는 바퀴벌레가 나오기도 했지만 맥스포스겔의 도움으로 모두 퇴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마와 바퀴벌레는 상극이라니 그리마가 살면 바퀴벌레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닌가 보다. 눈에 띄는 그리마를 굳이 살려보낸 보람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무시하고 자려고 했는데 정말 끈질기게 소리를 내고 있다. 벽지라도 뜯어먹는 거야 뭐야.
불을 켜 보니 4cm는 족히 넘는 왕바퀴벌레가 에어컨 호스와 벽지 사이에 껴서 더듬이를 쫑긋거리고 있다.
벽지가 영양분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백악기부터 살아오려면 저 정도의 생명력은 필요한 것 같다.
에프킬라가 없다. 종이 같은 걸로 처리하기에는 크기가 너무 크다. 에어컨 아래쪽에는 플스를 포함한 애장품들이 있어서 자칫하다간 그 위로 떨어지게 된다. 이렇게 된 이상 조용히 어딘가로 사라져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일단 불을 켜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오전 다섯시 반인데, 제발 어두운 곳으로 가라.
사각거리는 소리가 사라져서 보니 없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불쾌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낮에 맥스포스겔을 낭낭하게 뿌려줘야겠다. 전에 사 놓은 약은 너무 오래된 것 같은데 약국에 파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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톤업 선크림을 사 봤다.
마스크가 필수인 코로나 시대에 비비크림이나 파운데이션은 금지다. 마스크를 썼다 벗으면 마스크 모양대로 자국이 남는다. 특히 대각선으로 생긴 마스크 끈 모양은 수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묻어나더라도 흔적이 남지 않는 선크림을 사용해 왔다. 잡티 커버 기능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순수한 자외선 차단제다. 밖에 나가서 마스크 벗을 일이 그리 많지도 않다.
백신 접종 후 사람들을 만날 일정이 있다. 거의 쌩얼에 가까운 얼굴로 나가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후줄근한 느낌을 줘서,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질 정도는 아니어야 한다. 그래서 구매한 톤업 선크림이다.
톤 업(tone up). 밝기를 한 단계 올려준다는 뜻이겠지 하고 눈꼽만큼 짜서 얼굴에 발라 본다.
바른 부분의 피부색이 달라졌다. 아, 이건 많이 바르면 안 되겠구나.
바를 수 있는 최소한의 양을 얼굴에 발랐다. 정말 피부 위에 얇디얇게 펴바른 정도?
거울 속에 가오나시가 있다.
립밤을 발랐는데 뭔가 부자연스럽다. 나는 선크림을 원한 거지 파운데이션을 원한 게 아니란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피부가 흰 편이기도 하지만, 화사하다는 미명하에 지나치게 희게 만드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다.
빵떡같이 흰 얼굴에 붉은 입술, 눈가도 붉게 칠하는 메이크업이 몇 년 전 유행하기도 했다.
그래서 보통 피부톤이라고 사서 얼굴에 발라보면 허옇게 뜨고, 어두운 피부톤이라고 해서 발라보면 어둡고ㅠㅠ
그러니까, 이 선크림은 어떻게 발라야 하는 거지.
그냥 이것이 톤업이다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으아아
※ 사실 이건 그림으로 그려야 제 맛인데 귀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