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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공채에서 PT 면접을 봤을 때의 일이다.
대학원에서 내가 한 연구 주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면접관이 내가 무엇을 했는지 관심이 없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자신의 전공 및 현업과 관련 없는 일에 끌려나와 면접을 보고 있는 면접관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연구 성과에 뻥을 약간 더해서 아주 멋진 연구인 것처럼 성공적으로 발표를 마무리했던 경험이 있다.
모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분야를 해 본 사람을 뽑는다는데 설명을 들어보면 면접관은 실제로 이 분야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새로운 분야 쪽으로 나가기 위해 포지션을 만든 것이다. 오랜만에 디바이스 피직스도 좀 보고, 동작원리도 다시 복습하고 회사 제품 라인업도 외우고, 코트와 구두도 사고 나름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절반은 만만했고 절반은 실망스러웠다.
만만하다는 말의 의미는, 공채 때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면접관이 아는 게 없어서 내가 그럴싸한 거짓말을 해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 같다는 의미다. 사기를 치려면 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최대한 신입사원에게 설명하듯 쉽게 설명했다.
실망스럽다는 말의 의미는 그래도 사람을 뽑겠다고 했으면 유관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조사를 하고 면접자에게 할 질문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다는 의미이다. 질문을 너무 두루뭉술하게 하니까 대답하는 입장에서도 곤란하다. 몰라서 대답을 못 하는 게 아니고 적절한 질문으로서 성립하기 애매한 질문들이 많았다. 그 분야에 크게 관심이 없어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신중하고 똑똑한 면접자와 도전적이고 야심 넘치는 면접자 두 가지의 선택지를 가지고 갔는데, 후자를 선택했다.
신중하고 똑똑한 점을 부각시키려면 양자의 배경 지식이 어느 정도 동등하고, 적절한 질문에 적절한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똑똑한 점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리버리하고 빠르게 면접을 끝낼 바에는 야심가 모드가 낫다는 판단이었다.
JD에는 내가 했던 일들을 해 본 사람을 구한다고 되어 있었으니까 적어도 내가 가진 경험과 지식의 가치를 알아주는 곳이기를 바랬는데.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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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재단 프로그램 관련해서도 계속 전화가 오긴 하는데, 내게 포지션 제의를 한 이유가 학교가 잘 알려져 있고 전 직장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고, 실제 수행해야 할 업무는 그것과는 관련이 없는 경우가 아주 많다. 내가 어떤 경력을 가졌고, 무엇을 해 와서 이러이러한 일에 맞을 것 같다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러이러한 전공에, 이러이러한 분야에서 일을 해서 이런 데 그 경력을 살리면 좋을 것 같다 라는 이유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었으면 하는데.
뭐 전 직장은 '나'를 필요로 했냐고 한다면 그것도 글쎄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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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꺼내 본 가방 끈을 이루고 있는 인조가죽 표면이 너덜너덜해져서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7~8년 전에 5만 얼마 정도 했던 가방이니 언제 망가지더라도 이상할 일이 없었는데, 평소에 잘 꺼내놓지 않다 보니 미리 확인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일 주일 전에만 확인했어도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어제 발견했다. 그렇다고 캔버스백이나 종이 쇼핑백을 들고 갈 만한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들고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구깃구깃한 가방과 벗겨진 가죽끈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막상 새 가방을 사려니 쪼들리는 지갑 걱정에 선뜻 손이 가지도 않는다. 쓰자니 너무 구질구질하고, 버리자니 당장 사용할 만한 대체제가 없고 말이다.
오늘은 여러모로 참 슬픈 것 같다.